*동이족 천손민족:2020년 국운 G *프랑스 6.8 혁명:제2의 소돔 고모라 *전광훈 6.8 혁명:제2의 평양 대부흥 *1875:미국 ‘시카고’ 부흥운동 *1904:영국 ‘웨일즈’ 부흥운동 *1905:인도 ‘카시아’ 부흥운동 *1906:미국 ‘아주사’ 부흥운동

by Admin posted Jun 0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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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hua* Ha' Mashiach !

*Yeshua* Messiah !

*Yeshua is the name of Jesus in Hebrew
*Yeshua means Salvation
*Yeshua means seeing

The Almighty the nail prints in the hands of
 

 

*예슈아*는 “구원” 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예수님의 본명으로서 전능자의 손에서 못자국을 보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다니엘의70이레는 구약의 요한계시록 이면서 인류역사의 척도이며 잣대인 신약의 종말 계시록

입니다

 

*다니엘의 70이레로 해석 되지않은 계시록은 전부 몽땅 ‘엉터리 계시록’ ‘망통 계시록’ 이다

오늘은 절기강해 설교 대망의 500번째를 넘어 5백 쉰 번째 (550) 시간으로서 주후 2017년 9월23일 신년절 Rosh Hashanah 나팔절 예수님 대관식후 백 마흔 세 번째 유대력 5781년 2020년 경자년 6월 7일 첫 번째 ‘예루살렘 구도 탈환 53주년’ 주일 예배 30분 강해설교 입니다

Juda Ven Samuel(12세기 랍비)

4가지 예언중 3가지 적중

*1517:오스만 투르크 예루살렘 점령 성공적중

*1917:오스만 투르크 예루살렘 철수 성공적중

*1967:예루살렘 구도 탈환 성공적중

*2017:모이셔 Coming-메시야 Coming 미성취 불발

*모세다얀 국방상*

1967.6.5 제3차 중동 6일 전쟁

*6일 작전 계획:성경 천지창조

주.월.화 수.목.금. 토(안식일)

이집트.시리아.요르단:이스라엘

가자지구, 골란고원 ,시나이 반도전체.요르단강 서안

*Yeshua-Jesus' Emergency Notice*

*예수님의 긴급 공지사항*

 

*김정은 존엄, 영부인 리설주 여사께*

*문재인 대통령,영부인 김정숙 여사께*

 

*평양 만수대 주인은 성령님 하나님 이십니다

*서울 청와대 주인은 예수님 하나님 이십니다

 

*평양 만수대 상공에는 성령님의 축복이 높이떠

 서 대기중에 있습니다

*서울 청와대 상공에는 예수님의 축복이 높이떠  서 대기중에 있습니다

*김정은 존엄께서는 2020년이 가기전에 존엄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성령님께 자리를 양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2020년이 가기전에 대통령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예수님께 자리를 양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6-7-2020 설교 제목

 

*동이족 천손민족:2020년 국운 G 

*프랑스 6.8 혁명:제2의 소돔 고모라 

*전광훈 6.8 혁명:제2의 평양 대부흥 운동

*1875:미국 ‘시카고’ 부흥운동:무디 

*1904:영국 ‘웨일즈’ 부흥운동:이반 로버츠 

*1905:인도 ‘카시아’ 부흥운동:판디타 라마바이 

*1906:미국 ‘아주사’ 부흥운동:윌리엄 시모어 

*할렐루야

*예슈아 하맛시야

*예슈아 멧사야

 

기 도

*이제 우리 함께 기도 올리시겠습니다

*오늘도 이 부족한 종 말씀 들고 단위에

섰사오니 말씀위에 기름 부어 주시옵시고 대언의

영을 나리워 주시 옵소서

*77억 인류들의 영원이신 주님!

*오늘 성령님과 함께 호위천사 가브리엘 미가엘을  대동하시고

*두 그룹천사의 바람날개 / 하나님의 전용열차 /

황금마차를 타시고 뉴욕도성에 있는 예슈아 선교

교회에 오셔서 좌정 하옵소서

 

*머리숙여 인사*

 

*감사 하옵고 예슈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지극히 높은 곳 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 하심을 입은 ‘천손민족-한 민족’의 평화로다

 

*할렐루야 - Hallelujah

*예슈아 하맛시야 - Yeshua Ha’ Mashiach!

*예슈아 멧사야 - Yeshua Messiah!

 

*영광과 존귀를 영원무궁 세세토록 받으시옵소서

*감사 하옵고 예슈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태양력 2020년 유대력 5781년

Yeshua 여 어서 속히 오시옵소서

Welcome! My Lord Yeshua !

Ascension Song of The Rapture

환희의 승천의 노래

Ascension Song of Yeshua

Yeshua 환희(歡喜)의 승천(昇天)의

노래를 부를지어다

 

*천군들아 천사들아 이 현 베드로 총장 목사님과 함께  ‘환희의 승천의 노래’를 부를 지어다

 아멘!

 

환희의 승천의 노래’

                                작사:성령

작곡:예슈아

   채보:현베드로

 

아멘!

*천군들아 천사들아 이 현 베드로 총장 목사님과 함께  ‘환희의 승천의 노래’를 부를 지어다

 아멘!

 

아 아 아 멘!

 

지극히 높은 곳 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 하심을 입은 ‘천손민족-한 민족’의 평화로다

 

*할렐루야 - Hallelujah

*예슈아 하맛시야 - Yeshua Ha’ Mashiach!

*예슈아 멧사야 - Yeshua Messiah!

 

*영광과 존귀를 영원무궁 세세토록 받으시옵소서

*감사 하옵고 예슈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6-7-2020 설교 제목

 

*동이족 천손민족:2020년 국운 G 

*프랑스 6.8 혁명:제2의 소돔 고모라 

*전광훈 6.8 혁명:제2의 평양 대부흥 운동

*1875:미국 ‘시카고’ 부흥운동:무디 

*1904:영국 ‘웨일즈’ 부흥운동:이반 로버츠 

*1905:인도 ‘카시아’ 부흥운동:판디타 라마바이 

*1906:미국 ‘아주사’ 부흥운동:윌리엄 시모어 

 

*동이족 천손민족:2020년 국운 G

 

프랑스 6.8 혁명:제2의 소돔 고모라

52 년전 1968.5

배경:

1968년 5월’은 프랑스 낭테르 대학에서 남학생의 여학생 기숙사 출입 규제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 시위다

모토:

‘금지만이 금지된다’ ‘구속 없는 삶을 즐겨라’ ‘혁명을 생각할 때 섹스가 떠오른다’

결과: 

프랑스 6.8 혁명으로 동거문화가 확산 되었다

동거의 핵심은 즐기고 권리만 누리되 책임과 의무는 피하고 이별은 쉽고 간단하다 

 

전광훈6.8 혁명:제2의 평양 대부흥 운동

113주년

Again 1907

*1907 한국 평양 대부흥 운동

 

*성령의 발 자취*

 

*1875미국 ‘시카고’ 부흥운동(1875-1900)

*1904 영국 ‘웨일즈’ 부흥운동(1903-1904)

*1905 인도 ‘카시아’ 부흥운동(1905-1906)

*1906 미국 ‘아주사’ 부흥운동(1906-1934)

 

*1875미국 ‘시카고’ 부흥운동(1875-1900)

 

*시카고 무디 부흥 운동*

전성기

1875-1900

*무디는 안수를 받지 안은 평신도였다.*

 

*교육은 초등학교 5학년 수준으로 문법에도 맞지 않는 언어를 구사하는 참으로 변변치 못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의 눈에 확연히 드러날 정도의 방언이나 예언, 기적의 은사를 지닌 사람도 아니었다.

 

*더욱이 무디를 포함하여 어린 아들 일곱에 쌍둥이 자매까지 유복자로 낳게 되어, 과부 혼자서 아홉 자녀를 기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늘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68:5)는 말씀을 굳게 믿고 애송하였다.

 

*네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너를 따라 다니실 꺼야"라고 하신 어머니의 말씀이 그를 늘 괴롭혔다

 

*그의 주일학교 선생 킴블(Edward Kimble)이 그를 찾아왔다.

킴블 선생은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받아드릴 것을 촉구하였다. 결국 무디는 양화점 뒷방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요1;12).

 

무디는 거리와 골목, 역전 대합실, 하숙집 근처 등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모아들였다.

노스필드의 소년 무디가 시카고에 온 지 불과 6년, 80여 학급에 학생 수 1,500명, 교사 100명이 넘는 어린이 전도자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1871년 초 무디가 시카고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할 때, 청중석의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쿡과 하커스트 부인(Sarah Cooke & Hawkhurst)이 자주 무디의 주위를 끌었다.

 

*예배가 끝나자 무디에게 "저희들은 오랫동안 당신을 위하여 기도해 왔습니다", "어째서 거듭난 성도인 나를 위해 기도한단 말입니까?", "왜냐하면 당신은 권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You need power).

 

그 후 무디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고 맴돌았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기름부음'(the anointing of the Holy Ghost)을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성령의 권능에 붙들린 사람*

 

그가 뉴욕시의 월가(Wall Street)를 거닐던 어느 날 하나님의 권능이 강하게 임하였다.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나도 강렬하여 무디는 하나님의 손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어떤 새로운 진리를 제시하거나 다른 부흥운동에서 처럼 입신·진동·신비적인 역사가 나타난 것도 아니었다.

 

 

무디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인 약 1억 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수백만 명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였다.

 

 

무디 부흥 운동만큼 20세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앙운동도 드물 것이다. 1875년부터 4반세기 동안 미국과 영국을 영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던 무디 부흥 운동의 중심무대는 미국 시카고다.

정상적인 교육을 포기한 무디는 1854년 17세 때 보스턴에 있는 자신의 삼촌 홀톤스의 구두가게에 취직했다. 여기서 일하던 1855년 4월21일, 그에게 일생 일대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이날 그가 다니던 교회의 교회학교 교사 에드워드 킴볼이 구두가게를 찾아와 일에 지친 그에게 따듯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다. 주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이후 무디의 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회심한 그날 오전 밖으로 나갔을 때

 

나는 태양과 새들,그리고 모든 것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무디는 1년 후 시카고로 이주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사업에 성공해 연 1000파운드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지만,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거리에 방황하는 수백 명의 도시 젊은이들이 무디의 설교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현숙한 아내 유그노 에마 레벨은 그의 사역에 동력을 제공했고, 아름다운 음성을 지닌 젊은 공무원 생키와의 만남은 무디의 사역을 완전히 바꾸었다.

무디가 시카고 빈민가에 설립한 교회는 생키가 합류하면서 영적 품격을 달리 했다. 영혼을 살리는 생키의 찬양이 동반된 무디의 부흥집회는 무디를 일약 대표적인 부흥 운동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생키의 찬양을 통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연 회중은

 

3R, 곧 

 

1.죄로 인한 타락(Ruin by Sin),

 

2.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Redemption by Christ),

 

3.성령에 의한 중생(Regeneration by the Holy Spirit)

 

으로 대변되는 무디의 선명한 메시지를 듣고,

회개와 구원의 은총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복음의 열정에 불타던 무디는 두 차례 영국에 전도 여행을 떠났다. 조직도, 자금도 준비되지 않은 채 영국 리버풀에 도착한 무디와 생키는 은혜로운 찬양과 서민적이면서도 강력한 복음 메시지를 통해 리버풀 요크 뉴캐슬 런던에 이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무디의 집회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임했고 그의 설교는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한 영국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알겠다는 매우 뜨거운 열정을 느끼지 않고는 결코 무디의 설교를 들을 수 없었다”

 

무디와 생키로 인해 버밍엄에서도 부흥의 불길이 그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회중에게 옮아붙는 듯했다. 평이하면서도 결단을 촉구하는 무디의 메시지는 수많은 영혼을 깊은 잠에서 깨웠다.
 

 

무엇보다 수많은 젊은이가 무디의 선명한 메시지를 듣고 해외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882년 11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열린 무디의 집회는 학생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수많은 학생이 눈물을 흘리며 세계 선교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7명의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생이 화려한 장래를 뒤로 하고 중국 선교를 자원한 것도 이때였다. 그 현장을 방문했을 때 열정을 토하는 무디의 설교와 기도의 함성이 12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내 귓전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무디 부흥의 영향은 참으로 놀라웠다. 무디는 무디성경학교와 마운트 헐몬 학교를 통해 수많은 그리스도의 일꾼을 양성하고, 존 모트와 로버트 윌더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의 가슴에 해외 선교의 불을 지폈다.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역시 무디 부흥의 산물이었다. 수많은 젊은이가 무디의 설교를 듣고 해외 선교를 자원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미국은 영국을 앞지르고 해외 선교 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1900년 4000명에 불과했던 미국 선교사 수는, 4반세기가 지난 1925년에는 1만4000명으로 급증, 영국을 훨씬 앞질렀다.

 무디의 부흥은 세계 근대 선교를 앞당겼다. 무디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에 불타 5대양 6대주로 달려갔다. 그중에 아시아는 선망의 선교지였고, 조선은 가장 선호하는 나라였다. 돌이켜볼 때 무디 부흥의 가장 큰 수혜자는 조선이었다.
 

제임스 게일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무디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고 은둔의 나라 조선으로 달려왔던가!

 

1888년 게일이 한국을 향해 북미를 떠나기 바로 전날 51세의 무디는 게일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지의 나라로 향하는 한 젊은이를 이렇게 격려했다. “자네 조선으로 간다지. 내 자네를 위해 기도할 걸세,”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역 마포삼열, 윌리엄 블레어, 그레이엄 리, 스왈른, 찰스 번하이젤, 윌리엄 헌트 역시 무디 부흥을 경험하고 복음의 열정에 불타 조선으로 달려왔다. 이들은 이 땅에도 거룩한 부흥이 임하기를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부흥을 꿈꾸는 무리가 구름처럼 생겨났고, 마침내 평양과 한반도 전역의 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비록 무디는 한번도 이 땅을 밟은 적이 없지만, 그의 흔적은 1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에도 한반도 구석구석에 깊게 배어 있다.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들어 위대한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지금 이 땅의 교회는 제2의 무디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다. 오 주님,그같은 인물을 어서 속히 보내주소서!

 

*1904 영국 ‘웨일즈’ 부흥운동

*모리아 교회*

 

영적 부흥기가 있는가 하면 영적 침체기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을 통해 발견한다. 하나님이 택한 민족인 이스라엘도 영적 부흥기와 침체기를 겪었으며 개인적으로는 선지자 엘리야에게서 그것을 발견한다.

영적 침체에 빠져 있던 18세기 영국은 웨슬리와 같은 위대한 인물로 말미암아 새로운 부흥기를 맞게 됐으나 세월이 흐르자 또 다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20세기초 영국을 부흥시킨 강력한 성령운동이 웨일스 지방에서 일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1904년의 웨일스 부흥운동이다. 이 부흥운동은 당시 유명한 영적 지도자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또 대도시의 규모가 큰 교회에서 시작된 운동도 아니다.

*1904년 웨일스 부흥운동은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반 로버츠’(1878∼1951)라는 무명의 청년에 의해 시작됐다. 그 진원지 역시 웨일스의 한적한 시골(로)에 있던

‘모리아 교회’라는 작은 교회였다. 웨일스 부흥운동은 영국 전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된 강력한 성령운동이었다.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1907년에 일어난 이 땅의 부흥운동 역시 바로 웨일스 부흥운동에 자극 받았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 초기 사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웨일스 부흥운동의 주역 ‘이반 로버츠’는 웨일스 지방 글레모건에서 광부의 아들로 출생했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14형제 중 아홉째로 태어나 교구학교에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2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광산에서 힘든 일을 했으며 한때는 대장장이 일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04년 칼뱅파 감리교회 목회 후보자로 선발되어 뉴캐슬 에믈린에 있는 대학예비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그러나 이반은 빈한한 생활 속에서도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다’는 강한 영적 욕망을 가지고 자라났다.

그는 웨일스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11년전부터 남달리 기도에 전념하고 밤을 지새우며 성경을 연구하는 등 성령의 도우심을 구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그는 하나님께서 한 시대를 위하여 준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로버츠는 기도와 말씀으로 준비한 이 기간에 자주 시대적인 환상을 보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고 한다. 마침내 1904년에 이르러 웨일스 도처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이러한 영적 분위기는 하루아침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로버츠를 비롯한 일단의 기도용사들이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기를 오랫동안 기도해왔기 때문이었다.

로버츠는 즉각 고향으로 돌아가 모리아 교회를 중심으로 기도집회를 시작했다. 그해 10월 30일 그는 기도중에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자 그 다음날 지체 없이 고향 교회로 돌아간 것이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기념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성령에 사로잡힌 로버츠는 모리아 교회 담임목사 다니엘 존스에게 자신이 체험한 비전을 얘기하고 설교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무명의 전도자를 좀처럼 교회는 쉽게 받아 주지 않았다. 가까스로 설교의 기회를 얻은 로버츠는 “성령님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나가도 좋습니다”라고 담대히 도전했다. 그 결과 그의 첫 집회는 남아있던 17명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같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17명 모두 회개하고 성령충만함을 받게 된다.그중에는 로버츠의 동생과 세 자매도 포함돼 있었다. 부흥의 불길이 웨일스의 모리아 교회에 떨어졌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첫 집회 이후 30일만에 3만7000명이 주께 나아가 회개하고 놀랍게도 5개월만에 웨일스 전역에서 10만여명이 교회를 찾게 됐다.

이러한 놀라운 사건으로 사람들은 이반 로버츠를 ‘웨일즈의 죤 웨슬리’라고 불렀다. 보잘것 없던 한 소년광부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크게 들어 쓰신 것이다. 특히 그의 성령집회에는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대거 참석했는데 그들은 눈물로 회개하며 훔쳐온 연장을 돌려주거나 함부로 다룬 당나귀를 껴안고 사과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웨일스의 부흥운동은 그 지방의 사회정화운동을 가져와 술집과 당구장이 텅텅 비고 형무소 죄수들에게까지 전도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처럼 뜨겁고도 강력한 웨일스 부흥운동은 영국 전역과 미국 캐나다 인도 중국 뿐 아니라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니

그것이 바로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미국의 저명한 목사 존스턴 박사가 직접 웨일스를 방문하여 로버츠의 부흥회를 목격했을 뿐 아니라 이반 로버츠 목사에게 부흥의 비결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그후 그는 중국에 가서 여러 곳에서 웨일스의 부흥운동을 증거하다가 1906년 9월 서울에 오게 된다. 그 무렵 마침 장로회연합회가 개최되었는데 존스톤은 그곳에서 웨일스 부흥운동을 간증하였다. 그때 그곳에 모인 선교사들과 목사들이 큰 감동과 도전을 받고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을 갈망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한국 교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길선주(당시 장로) 목사도 큰 은혜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1907년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회개와 영적 대각성운동의 시발점이다. 참으로 시공을 초월한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2020년은 한국교회 성령 113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 하는 성령 113주년이다. 1907년의 장대현사건은 1904년 웨일즈 사건이 가져온 성령의 연쇄폭발이다. 성령

113주년을 맞이하는 한국 교회는 다시 한번 이 시대에 제2의 웨일스 모리아교회 부흥운동과 제2의 장대현교회 부흥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극심한 영적 침체와 현실적 분열을 겪고 있다. 국민은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다. 이러한 때에 이 민족이 살 길을 한국 교회가 열어야 하며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제2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필자가 웨일즈 부흥운동의 진원지인 모리아 교회를 찾았을 때는 교회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수소문 끝에 교회를 관리하는 다이프리그 그리피즈 장로를 만나 교회를 돌아보게 됐다. 정원에는 이반 로버츠 목사의 흉상이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뒤뜰에는 세상을 떠난 성도들의 무덤이 보존돼 있었다. 그 중에는 이반 로버츠와 함께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그의 동생과 누이들,그리고 부모까지 한자리에 영면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1905 인도 ‘카시아’ 부흥운동*

*여성 해방을 이끈 선구적 인도 기독교 지도자*

*판디타 라마바이(Pandita Ramabai,(1858~1922)*

'석학의 여신'
 

*사도 도마에서 이름이 유래한 '마르토마'(Mar Thoma) 기독교인은 인도 남서부를 중심으로 오늘날에도 상당한 세력을 과시한다.

*판디타 라마바이(Pandita Ramabai,) (1858~1922)도 그 '처음'에 해당하는 유산을 만든 인물이다. 브라만 계급에 속한 데다 최고의 ‘산스크리트’ 문헌 해석자로 명성을 날리던 여성이 19세기 후반에 기독교로 개종한 드문 사례를 만들었다. 

 

*개종한 후에는 거의 최초의 인도 여성해방 운동가로 활약하면서, 전 세계 여성운동 지도자들의 모델이 되었다. 묵티선교회를 만들어 인도 여성 및 고아들의 대모가 되었는데, 이 선교회를 중심으로 성장한 공동체의 최고 지도자는 인도인 라마바이였고, 서양 선교사가 그를 보조했다. 현지 기독교인이 상관이고 서양인 선교사가 보조인 이런 선교 현장은 20세기 중반 이전에는 세상 어느 곳에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라마바이는 20세기 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부흥의 원류 중 하나로, 평양 대부흥에도 영향을 끼친 1905년 묵티 부흥의  주역이었다. 

*마라티어 성경 번역*

 

*주로 신앙 구도자이자 사회 개혁자로 더 많이 활동하며 이름을 떨친 라마바이가 언어적·학문적 천재성을 발휘한 영역은 성경 번역이었다. 인생 마지막 20년이 시작되는 1900년 무렵부터 라마바이는 지역 언어인 마라티어(Marathi)로 된 성경전서를 번역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거의 전적으로 시간을 투자했다. 

 

*라마바이는, 지역 평신도 선교사들이 다른 언어를 알지 못하는 현지 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한 이 성경 번역을 완료한 지 8개월이 지난 1922년 4월 2일에 사망했다. 결국 이 성경은 라마바이가 자기 민족에게 남겨 준 가장 큰 신앙 유산이었다. 라마바이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어원에 기초해서 마라티어 용어 사전을 편집하기도 했다.

 


*1906 미국 ‘아주사’ 부흥운동

*아주사 대부흥운동(Azusa Street Revival)*

*윌리엄 시모어(William Seymour)*

 

*1907 한국 ‘평양’ 대부흥 운동

*길선주*

 

아주사 부흥운동의 흔적은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스트리트 312번지 도쿄타운 전봇대에 부착되어 있는 아주사부흥운동에 대한 기록 간판이 전부다.그러나 아주사부흥운동은 이듬해인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부흥의 불길을 점화시켰다고 교회사가들은 말한다.

 

아주사 부흥운동의 한 목격자는 다음과 같이 아주사 부흥에 대해 말했다.


“los angeles에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이 임하고 있다는 뉴스가 멀리 퍼졌다. 악기도 사용치 않고, 필요치도 않았다. 성가대도 없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천사들의 밴드 소리가 성령 안에서 들려졌고, 하늘의 노랫소리도 들려졌다. 헌금하지 않았고 집회를 광고하기 위해 안내장들이 우송된 적도 없었다. 이 집회 뒤에 조직은 없없다. 하나님과 만난 자마다 자신이 성령께서 이끌고 있는 집회에 들어왔음을 금방 깨달았다. 한 형제는 그의 기차가 도시에 들어오기도 전에 부흥의 능력이 임하고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azusa 거리에 있는 석회도료로 칠해진 2층 건물의 본부에 모인 사람들은 아침 10시부터 밤 12시까지 계속되는 강력한 오순절 부흥을 체험했다. "

서울신대 교회사 박명수 교수는 “20세기에 들어서서 강력한 첫번째 부흥운동은 1904년 영국의 웨일스 지방에서 일어났다. 웨일스 부흥운동의 소식은 곧 널리 퍼져서 1905년 인도 카시아 지방의 부흥,1906년의 미국 아주사 거리의 부흥,1907년에는 한국 평양 대부흥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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